Saturday, March 18, 2006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





1. 희망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에 대한 설교1편

-2001년 3월 ‐ 3.1절

에스겔37장 1~14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러분들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가장 쓰면서도 달콤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답은 (마태복음15;18.19, 마가복음7;20~23, 야고보3;36 참고) ‘혀’ 또는 ‘혓바닥’입니다.세상을 장악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귀향 보내고, 숙청을 했었던 독재자들이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대중의 혀, 곧 국민들의 입이었습니다.

독재자들이 볼 때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의 혀는 발길에 체이는 돌멩이같이 허무한 존재에 불과 할 때가 많으나, 그 연약한 혀가 뭉쳐질 때는 사자의 혓바닥처럼 우렁찬 포효소리를 발하게 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저절로 대중의 입이 모아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그 사회의 지식인이요, 시인이요, 예언자들입니다. 평화로운 시절이나 살기 좋은 사회에서는 시인의 역할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이 농사짓고, 직장 다니고, 자식 낳고,...각자가 제 살기에 바쁩니다. 이럴 때 ‘시’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값어치 없고 쓸데없는 것'으로 평가 받기도 합니다.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초등학교 산수시간에 배운 +,-,×,÷의 4칙 연산이지, 우아하고 도도해서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시인의 언어’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투자하고, 투자한 만큼 확인 되어지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정신세계를 운운하는 것은 허깨비 같은 존재외에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세상은 허깨비, 몽상가, 쓸데없는 짓거리나 일삼는 사람들에 의해 이끌러 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예를 들면, 패션쇼에 나오는 범인들이 입을 수 없는 의상들과 건축물 전람회에 내보인 황당한 건축물, 문학상에 빛나는 시인들의 지극히 난해하면서도 상징화 된 언어...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입고, 자고, 쓰는 문명의 혜택들은 10년, 20년, 100년 전에는 미친놈들의 미친 짓이거나, 괴짜들의 쓸데없는 짓거리들로 묶이던 것들이었습니다. 100년 전, 아니면 불과 50년 전, 30년 전과 비교해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 주택, 의상, 언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해되실 것입니다.

미래를 말하고, 미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기존의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현실을 유지시키고 발달시키는 것은 현실적인 사람들에 의해서지만, 미래를 말하고 발전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몽상가들 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문명에만 매여 있을 때, 시인들의 언어와 사상은 다가 올 미래,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 너머에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믿음을 심어 준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예언서는 이런 점에서 시인이고, 또한 시이면서, 미래를 제시하는 예언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2가지는

1)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기록되어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문자대로를 외치면서, 문자만을 중요시하다 보면 그 글자와 그 글자가 속해 있는 문장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구나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인간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됩니다.가령, 광복절 노래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를 초등학생이 읽고 해석한다면, 문자 그대로 머리 속에 바닷물이 춤추는 것을 연상할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발전한다 하더라도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를 떠올릴 겁니다.

우리가 일본한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후에 치욕 속에서 36년이 지나고 1945년 8월15일 일본천황의 항복으로 나라가 해방되자 시인은 자기의 감정을 노래합니다.발아래의 땅도 어제의 땅이고, 하늘도 어제의 하늘, 이웃의 사람들도 어제의 그 사람이 그 사람이건만, 그토록 바라던 해방이 되자 기쁨으로 가슴이 떨리고, 터져 나갈 것 같은 감격으로 조국의 흙 한주먹을 다시 움켜쥐게 됩니다. ‘조국강토 곳곳에서 출렁이는 바닷물조차도 자신의 마음같이 기쁨의 춤을 추고 있구나....’ 아마도 이것이 광복절 노래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의 해석일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머릿속으로나마 여러분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어 1945년 8월15일. 일본으로 끌려갔던 이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귀국선 뱃머리에서, 아니면 이름 없는 전쟁터에서, 혹은 타국의 어느 하늘밑에서 조국 해방의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면, 바닷물이 춤 출 수밖에 없었던 그 기쁨을 비로소 접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성경의 본문은 철저히 시대와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굴욕적인 36년 식민지 정치아래 우리나라 안에도 지식인은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이 땅에서 헐벗은 대다수의 국민들보다 많은 혜택을 받은 이들이 그 당시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 지식인들 중 소수만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조국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의 백성을 위해, 그들의 혼을 불살랐습니다.

그 반면에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자기 한 목숨, 자기 부모, 자기자식, 자기 아내만을 위해 ‘자신의 안녕’을 도모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집니다.
3·1운동 당시의 교계의 지도자들. 나이어린 유 관순, 우리의 정서를 빌어 민족혼을 일깨우려는 홍 난파, 나라꽃 무궁화 심기 운동의 남궁 억, 청년기상을 외친 안 창호, 정의의 상징 윤 봉길, 절망과 구도의 염원사이에서 씨름하던 한 용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절망하던 이 상화.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혼 바쳐 절명한 윤 동주....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지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안 익태,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조국 조선을 위해 조선 백성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희망을 심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 속의 예언자적 인물들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만 보지 마십시오!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그 밖의 무병의 시인들까지도 예언자의 일생은 고난으로 얼룩져 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빼앗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국제 정세의 판도에 따라 풍전등화 격인 조국의 운명을 위해, 이미 망한 이스라엘의 실의에 찬 실향민들을 위해, 좌절과 고통으로 신음하며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던 포로 민들을 위해, 조국의 재건을 위해 고생하는 귀향 민들을 위해....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대다수가 그야 말로 힘든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투쟁이었습니다.

자기나라에서도 탄압 받던 예언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활동한다면 그 삶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일제치하에서의 우리나라 시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경성에서, 동경에서, 여순에서.... 징역살이, 모진 고문, 병든 몸, 사형,...이것이 민족혼을 일깨워 주던 시인들에게 따라 붙었던 대가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 37:1절 이하의 본문도 이러한 맥락, 즉 포로 민들의 기막힌 상황과 민족혼을 위해서라면 모든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불사르는 선지자의 절규와 희망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주전 587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이 군데를 거느리고 내려와서 예루살렘 성을 침략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세운 하나님의 집-솔로몬 성전-까지 훼파하고 백성이 사는 예루살렘거리는 무자비하게불로 태워버렸습니다.또 항복하지 않는 백성에게는 학살을 감행하고, 항거치 못하는 무리 가운데서 왕과 제사장, 서기관등 예루살렘의 중심인물들을 결박하여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열왕기하 24장13절). 이에 대한 기록이 예레미야 39장, 열왕기하 25장, 역대기하 1장, 시편137편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것보다 11년 앞선 598년에 여호와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 중의 제사장이었습니다.여호와긴 왕과 신하들, 몇몇 귀족들만이 바벨론도성에 포로로 붙잡혀 있었던데 반해서(열왕기하 25장 27절 이하) 나머지 포로 민들은 바벨론 남쪽지역의 점점이 흩어져 식민 개척자들로서 황폐한 국가농장 마을에 정착시켰습니다.그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것입니다.팔레스타인의 산악기후에 길들여져 있었던 이스라엘의 포로 민들은 바벨론 저지대에 위치한 뜨거운 늪지대에서의 중노동은 거의 견뎌낼 재간이 없었습니다.이때 포로 민들의 심정이 시편 137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애가3;4참조)

희망이 없고, 고통과 자포자기의 체념이 강하게 포로 민들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가 3장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시었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이런 노래를 불렀으니, 남의 나라로 끌려온 포로 민들은 이제는 죽은 목숨과 진배없다는 자포자기의 절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암울한 시기, 남의 나라 땅, 괄시와 천대를 받던 바벨론에서 에스겔은 예언자로서 여러 가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에스겔의 대표적인 예언은 오늘의 본문 '마른 뼈들의 환상'입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환상 속에서 본 골짜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해골로 가득하였습니다.

여러분, 에스겔의 묵시 안에서 출현한 기괴한 광경을 상상으로 그려봅시다.
수많은 사람들의 뼈가 죽은 지 수십 년이 되어서 바싹 마른 뼈다귀가 되어 골짜기에 가득했습니다. 그 뼈들은 아무 모양도 없이 제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마치 흩어놓은 장작 같았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을 것이며, 힘과 소망이 없는 마른 뼈다귀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르시기를 “인자야, 이것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에스겔은 대답합니다. “내가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시나이다.” (에스겔37;3)이 말속에는 ‘이 같은 마른 뼈다귀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능히 살리시려면―살릴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그의 이러한 대답은 소망도 힘도 없으나 하나님께서는―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즉―능히 하실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이 사망 당한 뼈다귀들에게 예언하라고 하십니다.(에스겔37;5)
여기서 ‘예언’이란 말의 뜻은 장래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언 자 라는 뜻도 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해골들에게 '해골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하고 5절 이하의 말을 외치자, 뜻밖에 큰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어나고 모든 뼈들이 서로 짝을 찾아서 각 해골이 제대로 조직 되었습니다. 해골 조직이 끝난 후에 또 보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까지 덮였습니다.
이제는 완전한 사람 모양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상상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완전한 사람의 모양새이지만 아직은 죽은 송장 들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 속에 가장 귀하고 중요한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 번째 대언하게 하십니다. “인자야! 생기를 향해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이 명령을 쫓아 예언하기를 "생기야 사방으로부터 불어와 이 사망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별안간 바람이 불고 송장 속에 생기가 들어가니 그들이 살아서 그 발로 일어서매 지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생기’는 창세기 2:7 ‘여호와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신 다음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때 비로소 생명 있는 인간이 되게 한 그 생기’ 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을-세상 어디서나 그의 백성들에게 성장과 번영을 준다는 것을-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입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고통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의 포로 민들에게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고 희망을 심어 주려는 것이 그가 예언한 메시지의 목적입니다. 에스겔 37:12절, 37:21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땅,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희망의 예언이 선포됩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서 40‐55장에 걸쳐서 다시금 주창되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포로 민들의 포로지의 생활이 오죽했으면 그들을 죽음의 골짜기에서 뒹구는 뼈다귀들로 표현 했겠습니까!

예언자의 시어는(시는) 추상적이고 센티멘털한 감성에서 나온 단어가 아닙니다. 구체적이면서도, 고통뿐인 실제의 현실을 한 맺힌 가슴으로 읊고 있는 것입니다.’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조국의 광복을 위해 감옥에서 병들어 젊은 나이에 절명한 시인의 혼을 에스겔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에스겔은 넋두리로 자신의 한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희망’을 바라보고서 그 희망을 포로 민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스겔은 진정한 제사장이고 예언자인 동시에 시인인 것입니다.

그 희망은 11절~14절에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에스겔은 다시금 이스라엘 포로 민들의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흔적조차 빼앗긴 상태를 11절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다 하느니라." 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죽은 자들의 뼈에 대한 비유는 에스겔이 예언을 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괴로움,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삶 속에서 발 구르고, 뒹굴고, 울부짖을 때 비로소 (여호와의)구원의 손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수없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로 민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실제'는 고국, 즉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포로 지의 땅에서 포로민의 생활이 오죽했으면 무덤에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고 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의 삶 가운데 죽음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 강제로 이주 당 했던 여러 민족의 운명에서 그러한 것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음을 무수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민족들의 거대한 무덤인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은 이끌어 낸다는 것은, 죽음의 세력으로 해방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가져 다 주는 승리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41:9, 이사야41:26, 이사야43:12. 이사야43;14‐21, 이사야48:20‐22 참고)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능가합니다.
그 하나님의 기적만이 죽음의 땅에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포로 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임을 에스겔은 있는 힘을 다해서 포로 민들에게 알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 가운데서 바라는 희망이고, 구원입니다.

과거를 미래와 연결시킬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이 말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성경은 이 역설을 강조합니다. 야곱의 일생, 요셉의 일생, 출애굽시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광야의 생활, 그 밖에 욥, 요나, 사사기의 수많은 사건들, 십자가위의 예수님.....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 속에는 '인간들에게 부딪친 죽음과 같은 고난’과 ‘그 고난 위에 쏟아진 하나님의 은혜'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 37장 1‐14절은 피상적이고, 환상적인 위로의 말을 가지고 좌절한 포로 민들을 향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파멸의 땅에서 당하고 있는 극심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잃어버린바 된 사람들을 하나님과 새로운 사귐, 새 계약을 맺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시는 그 시를 지은 사람에게도 중요하지만, 그 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자에게 비로소 생명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절망에 빠진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이들 가운데서도 소수만이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여호와로 인한 희망과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조차도 이겨 낸 생명의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20)는 약속을 여러분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고집스럽게 희망에 걸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 말을 소유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이 말씀을 소유할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말;
예언자의 언어는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센티멘털의 산물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역사라 하더라도 사실을 알리고, 또 알아야 합니다.예언서의 언어가 불타는 것 같은 현실의 언어임을 음미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더 해 봅니다.

또 다른 설교 자료는 내 개인홈페이지, http://www.mryoum.com/ma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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