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7, 2007

옛날을 기억하라.




6."옛날을 기억하라."
6. “Remember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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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마지막 주일 ‐ 현충일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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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2장7절~12절 "옛날을 기억하라."에 대한 설교
-현충일에 되새겨보는 신명기 32장7절~12절의 "옛날을 기억하라."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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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2장7절~12절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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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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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윤 숙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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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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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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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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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 숲을
이순신 같이, 나폴레온 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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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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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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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질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를 소원 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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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한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 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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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던 그 옛날부터 전쟁은 줄기차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 전쟁들의 공통점은 자기네들이 수행하는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데 있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을 떠나서 전쟁에 진편은 항상 있어 왔고 간혹 양방이 비겨서 휴전상태가 존립한다 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그칠 줄 몰랐고, 전쟁의 주도권자인 국가의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전쟁의 합리화를 위해서 '신의 명령'을 접목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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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무수한 전쟁들의 실상은 국가나 국민들을 위한 싸움이 아니고 왕의 개인적 감정이나 욕심에서 일어난 전쟁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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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전쟁 앞에 내세운 것은 '신의 위대한 지상명령'이라는 슬로건 이였고, 이 전쟁들은 마치 신들을 위한 전쟁처럼 꾸며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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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가 성경 속의 출애굽의 역사, 중세의 십자군 전쟁. 현 아랍세계의 지하드 전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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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로 싸움, 전쟁의 의미를 지닌 ‘JIHAD’는 신앙의 원리로 인해서 발생되는 전쟁을 나타내며, 지하드란 말은 '거룩한 전쟁' '신을 위한 전쟁'이라는 말로써 보통 거룩할 '聖'을 써서 종종 '성전' 이라고(Holy War-거룩한 전쟁)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이슬람 국가들의 국지전, 또는 동유럽이나 아프가니스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의 내전들은 이 지하드의 성격이 강한 전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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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싸움’-결국 그 신들에게 바쳐지는 전쟁의 제물은 여기 저기 뒹구는 인간들의 시체와 붉은 피가 엉켜 붙은 검붉은 대지였습니다.
전 세계를 전쟁으로 술렁이게 했던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다른 나라들을 침략한 독일,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도 그들이 신봉하는 신을 내세워 ‘신의 명령’이며 ‘신을 위한 충성’이라는 합리화된 전쟁의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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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또는 여호수아의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할지라"라는 무지막지한 성경속의 용어를 3000년 아니면 2500년이 지난 후대에 와서도 이 용어와 사상을 강대국들의 지도자들이 써 먹었을 때,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남아메리카 인디오들을 죽이는데 양심의 가책은커녕. 신의 사자로써 엄청난 일을 하는 양 착각하며 죽이고, 빼앗고, 불사르고, 강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 했습니다.
영국의 고상한 청교도들은 미국의 흑인을 개나 소처럼 때리고, 죽이고, 사육시켜서 팔아먹고, 인디언은 악마니까 보이는 대로 죽이는 것이 마치 ‘신의 소명’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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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정한 신의 음성을 들으려고 영국에서 목숨 걸고 건너온 이들인-무지막지한, 그러면서도 위대하고, 고상한 신앙의 수호자들인-청교도들이 한 일입니다. 이 잔인함이 위대한 미합중국을 건설한 이들의 200~300년 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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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위에서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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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장 4절
"그가 열방 사이를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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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4장4절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 하셨음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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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평화의 상태를 노래하거나 염원하는 곳은 성경 곳곳에 많습니다. 이 부분을 거꾸로 이해하면 그 만큼 팔레스타인의 척박한 기후와, 불완전한 국제정세와, 끊임없이 충돌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야 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란 것이 긴급하고, 힘들고, 고생스러웠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구절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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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위에서 험한 길 가는 동안 진정한 평화는 없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강자나 영원한 약자....영원히 변화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국가적인 것도 그렇고, 사회적인 것도 그렇고,...국제정세 역시 바뀝니다. 개인의 나이에 따라 육신이 변해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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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바뀜의 역사를 통틀어 ‘역동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키면 ‘인류 역사’는 ‘뒤바뀜의 역사’란 말로 표현 될 수 있고, 이런 ‘역동성’의 예는 인간세상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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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 전에는 진짜 쌍놈의 자식들이라 일컬어지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는 대기업의 회장으로 군림하거나 유명한 학자, 종교가로 자리 잡고, 그 반면에 명문대가 양반의 자손들은 그의 선조들이 쌍놈이라고 인간이하로 천대하던 쌍놈들의 후손들이 세운 회사의 수위로 있거나, 그 수위한테도 쫓겨나는 손수레 행상꾼으로 살아가고,...어제의 강대국 소련이 붕괴되어 수많은 나라들로 나뉘고, 많은 나라들이 독립국가로 다시 탄생하고,... 이러한 현상 모두를 합쳐 ‘역동성의 역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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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역동성이란? 신학적 용어는 ‘거꾸로 바뀐다.’는 말을 어렵게 표현한 용어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신명기 32장7절~12절도 이러한 역동성 속에서 살펴야만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누가복음 1장46~55절의 ‘마리아의 찬가’ 마태복음 5~7장 ‘산상설교’가 역동성의 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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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신명기 32장7~12절이나 신명기 13장 15절, 여호수아 6장21절, 여호수아 8장26절....그밖에도 구약의 전쟁 이데올로기인 "용사이신 여호와" 사상이 나타난 구절들-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본문들의 내용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적용시킬 수 있는 본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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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했듯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굳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들이 '호흡이 있는 자들은(것들은) 진멸할지니라' 라는 부분을 가지고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고, 남의 인생을 개처럼 만드는 일은 흔히 있었습니다.
본인들은 그 짓밟힌 인생 위에 또는 나뒹구는 수많은 시체 위에서 전리품을 손에 거머쥐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 기도를 들어 주시고....하늘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이 땅 위에 평화가 임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이런 종류의 희한한 기도를 가장 제대로 된, 아니면 가장 신령한 믿음을 소유한 신자인양, 탐욕스러운 착각 속에 인류역사 2000년을 장식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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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진리-이사야 40장8절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곧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생 개개인의 삶이 아무리 뛰어나고 찬란해도, 그런 삶들 역시도 시든다는 것을 착각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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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씨앗을 땅에 뿌려 본 분들이라면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을 조금은 쉽게 납득하실 것입니다. 곡식의 씨앗이 땅에서 싹이 나고 그 연약한 새싹을 위해 처음에는 새싹 주위의 풀들을 새싹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뽑아 줍니다. 그래야만 그 연약한 싹이 땅에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싹이 자라감에 따라 몇 번의 ‘김매기’와 ‘북 돋아주기’를 해줌으로써 그 싹을 튼튼하게 길러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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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싹이 다 성장해서 꽃을 피우고 낟알이 영글 때는 절대로 밭에 들어가서 잡초를 뽑지 않습니다. 다 성장한 곡식밭에 잡초를 뽑으려고 들어갔다가는 오히려 사람의 손길에 가지나 줄기가 부러지기 쉬워서 곡식까지 다치게 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13장28~30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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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뱃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 뿐 아니라 주위사람 모두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 갓난아이의 시력이 형성되고 어머니와 눈 맞춤을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고, 뒤집고, 기어 다니고, 걸음마를 할 때 까지는 '안돼'라는 소리는 별로 안하고 주위사람모두가 그 아이의 행동에 맞춰 행동하거나 물건들을 치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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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아이가 1년 정도, 첫돌을 맞을 무렵부터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그 아이의 ‘자리 매김’, 즉 행동반경 속에서 지켜야 할 규례와 행동들을 학습시켜 나갑니다. 이런 학습과정은 나이에 따라 바뀝니다. 이러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우리는 ‘사회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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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화 교육’은 가정과 사회에서 같이 이뤄집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사회에는 적응을 잘 됐으나, 가정에서 7살 어린이처럼 행동 하는 것을 우리는 '마마보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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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마보이는 언제까지나 어머니-아들 관계 속에만 있으면 괜찮으나, 성장해서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문제점에 부딪칩니다. 어머니한테 부린 응석은 어머니만 들어주지 아내나 애인은 여인 일뿐, 어머니가 아닌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반대로 가정에 적응을 잘 했으나 사회에 적응 못하면 극심한 우울증이나 자폐 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인간이나 동물은 성장에 따른 행동반경이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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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곡식이나 야생동물, 가축, 사람 할 것 없이 성장에 맞는 ‘자리 매김’, 즉 어떠한 종족이라도 그 종족이 살아가는 환경이란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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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 매김’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적용 할 때 비로소 신명기 32장7~12절, 신명기13장15절, 여호수아6장21절, 여호수아8장26절...그밖에도 구약의 전쟁 이데올로기인 "용사이신 여호와"를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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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고난 받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해서 그들을 고난의 땅, 죽음의 땅, 종살이의 땅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사 (출애굽기 19~20장 이하)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선택한 거룩한 백성들로 구성된 신생국가가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역사이고, 이 언약에 따라 새로운 백성들이 되는 법이 출애굽기19장 이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까지 입니다. 출애굽기19~20장 이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출애굽부터 광야를 거쳐 처음으로 가나안땅에 발을 붙일 때까지의 이스라엘의 ‘자리 매김’에 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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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들판을 보십시오. 모내기철입니다.
여러분이 보듯이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묘판에서 어린모를 곱게 길러서 논에 옮겨 (이앙)심어야 합니다. 그 연약한 어린모가 뿌리를 내리도록 모내기 전에 논을 갈고, 물을 대고, 다시 논을 갈아 흙을 곱게 부순 다음에 사람의 손이나 이앙기로 어린모들을 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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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린모가 새 땅에(논에) 뿌리를 내리고자 며칠동안은 어린잎이 하얗게 타 들어 가는 고생 끝에 더러는 타죽고, 더러는 살아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때는 주인의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죽어가던 어린모도 주인의 정성으로 살아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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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짐승도, 곡식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을 때는 주변의 잡초를 제거해 주거나 아니면 어린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부모(어미)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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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9~20장 이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를 곡식에 비교하면 바로 이런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땅에 처음으로 입성해 가나안땅에 발을 붙일 때까지의 이스라엘의 '자리 매김' 기록되어 있는 것 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호와는 이들을 무조건 보호하고, 지켜주어야만 했던 시기입니다. '용사이신 여호와'는 이런 과정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신학적 용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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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신명기32장7~12절 말씀은 이 과정을 되돌아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의 크신 은혜를 입으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과거를 돌아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의 크신 은혜와 보살핌으로 살던 선진들이 나이 들어 죽게 되면서 혹시나 후진들이 ‘배불러서 이제는 살만하다고, 우리가 언제 도움을 입었다고... 여호와가 뭔데... ’(잠언30장9절 참고)하는 소리를 할까 봐 “너희는 옛날을 기억하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보금자리에서 보호하듯. 우리를 보호하였음을 너희는 다시 듣고, 다시 배워,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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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영원하지만 정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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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특별계시지만, 그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하고 섬기면서 사는 방법에는 ‘역동성이란 성경 해석방법’을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모든 시대정신은 발전해도 성경해석만큼은 2500~3000년 아니면 칼빈이 살았던 시대(500년 전)로 시간을 묶어놓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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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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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찬가 누가복음1장46~56절의 마리아의 노래를 예로 들면, 그 노래의 핵심은 '역동성'입니다. 또 기독교 정신의 정수라고 일컫는 마태복음 5장 이하 7장까지의 ‘산상설교’ 역시 '역동성'이 집약된 곳입니다.
언제까지나 성경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자기만의 성경을 만들어서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 하라'는 부분을 마치 독재자의 등장을 위한 구호인양 착각하고 '성경대로' '신의 명령에 따른 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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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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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은 뛰어난 정치가도, 말 잘하는 웅변가도, 위대한 신도 아닙니다. 다만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조금씩 고쳐나가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현실주의 시각에서 볼 때는 오늘보다 나은 미래의 꿈이나 제시하는 ‘몽상가’ 일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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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현충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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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국민 중 몇%만이, 아니면 정치를 장악하려는 극소수 사람만이 원하고 만들어 낼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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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전쟁과는 상관없었던 국민들입니다. 전쟁을 계획하고 추진했던 이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들은 어떻게 하든지 피해 안보고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칩니다. 그 대신에 그들이 평소에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고 열등한 부류의 하층인간들이라고 생각하여 함부로 짓밟고, 무시하고, 농락하던 그 땅의 국민들을 전쟁의 희생물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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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위대한 국민, 애국자들이라 자처하던 자(!) 들을 대신하여 전쟁과는 무관했던 국민들이 재물이 되어 싸우다가 죽어가는 게 전쟁입니다. 그때마다 소리 없는 진정한 주인공들과 영웅들은 그 땅의 헐벗고, 못 살고, 짓밟히던 이들의 아들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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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시 그 옛날부터 뼈아픈 기억으로 얼룩져 왔습니다.
몽고와의 항쟁 때도,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과 싸웠던 의병도,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의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과, 6.25전쟁 때의 수많은 청춘들의 죽음도....대부분이 이름 없는 이들의 아들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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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컴에 등장하는 ‘병역비리’는 권력 있는 정치가, 돈 많은 사업가, 유명한 변호사, 병원 원장 등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 들이 자기의 피 같은(?) 아들을 위해 자기아들은 군대에서 빼낼 때, 그 숫자만큼 채워지는 머릿수는 그들보다 사회적 유명도가 떨어진 이들의 아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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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신문이나 방송매체에서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의 앞날을 논하고.... 사회의 도덕성과 규율을 외칠 때면 항상 앞장서는 이들도 병역비리의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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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유태인들은 '옛날을 잊지 말자'고 후손들을 교육 시킵니다. 2차 대전 때의 유태인에 대한 무참한 살육의 현장들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후손들에게 ‘원수는 갚지 말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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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맺힌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들의 인구수에 비해 월등히 높은 비율의 노벨상 수상자, 정치가, 교육가, 금융가 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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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섣부른 세계화, 섣부른 통일을 외치기 전에 후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견뎌왔고, 어떻게 살아가는데”를 자각시킴으로써' ‘한국인’이라는 이 땅 위에서의 소속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그 자신들을 자리 매김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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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앞날은 후손들에 의해 결정지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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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2장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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