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14, 2006

이사야40장에 나타난 포로민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실향민들의 '귀향'






너희 하나님을 보라.




-이사야40장에서 ‘타향살이’에 대한 비유와 본문의 강해


-2000년 12월 – 크리스마스 주간




이사야40장 1~11절
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한국 경제가 IMF 경제위기 이후부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서민들만 더욱 힘듭니다. 전셋집 하나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힘든 시기입니다.

100년 전 상황을 말하려고 합니다. 1900년을 전후로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러•일 전쟁, 청•일 전쟁,..... 한•일 합방 등의 정치적 혼란은 국가의 경제를 힘들게 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으로 국가간의 충돌싸움은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백성의 생활고는 나날이 피폐하게 변해갔습니다. 그 당시는 국민의 70%정도가 농업, 어업등 1차 산업에 종사했습니다.

많은 농민이 남의 땅에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땅 주인과 반: 반(5:5)으로 나누고, 국가나 관에서 걷어 들이는 각종 세금을 내고 나면, 남아 있는 곡식으로 다음해 보리 수확 때까지 견딘다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상황이 '보릿고개를 넘긴다.’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정도의 형편도 평년작이나 풍년작일 때의 사정입니다.

가뭄이나 태풍 등으로 흉년이 들거나 돌림병이라도 돌면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는 속담처럼 굶주리며 견디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남게 됩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보릿고개 넘긴다.' 등은 옛날 조상들의 생활고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소설 '토지'를 보면 흉년이 들면 백성들은 굶주리고, 울고, 죽고, 하는 판에 오히려 돈 많은 양반이나 부자들은 극심한 흉년일수록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농민들은-어린 자식과 늙은 부모를 굶어 죽일 수가 없어서-마지막 남은 땅문서로 바꾼 곡식으로 질긴 목숨 모질게 연명하는 반면, 부자는 가난한사람들의 목숨과 바꾼 땅문서들 덕택에 오히려 재산이 불어나고, 몇 년 뒤에 또 흉년이 들면 땅문서대신에 딸을 팔다시피 시집보내고, 아비나 아들놈은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가고....이러한 악순환이 되풀이 되다 보니 조선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돌이가 되었거나 다른 나라로 떠나가게 됩니다. (느헤미야 5:1‐5 참고.)

지금처럼 국제법이나 국가 간의 협약이 없던 때에 조국을 떠나-남의 나라에서라도 살아보겠다고-낯선 타국 땅에 발붙이는 것은, 현대의 이민생활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엄동설한에 전라도, 경상도에서부터 소달구지에 잡다한 살림살이와 어린것들과 노인네만 태우고 그 밖의 사람들은 괴나리봇짐을 지고서 추운 겨울에 강바람은 맞으며, 짚신 신은 발로 얼음바닥을 짚어가며, 강을 건너 흘러 들어간 곳이 연해주, 북간도, 중앙아시아....등 입니다. 더러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멀리는 하와이의 사탕수수밭과 멕시코의 선인장 농장까지입니다.

여기서 이들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질게 마음먹고, 눈물을 삼키며 밟은 남의 나라 땅에서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땅 한 평, 밥 한 그릇, 빵 한 덩이 주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영화에서만 흑인 노예들이 백인한테 매 맞으며 농사짓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100년 전 남의 나라에 흘러 들어가서 처음 발붙일 때도 이와 비슷한 처지 속에서 그들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의 실향민들로 시작된 한민족이민의 초기역사입니다.

조국 땅보다는 약간 덜한 형편이라지만 이곳에서도 그 나라 사람들한테 엎드리고 사정하고 구걸하다시피해서, 땅 빌려 힘들게 농사지으면 소작료로 엄청난 곡물을 바치고....자식들과 먹고 사는 것이 초기이민자들의 '지상과제'였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아이들은 커갔습니다. 커서는 사춘기의 두근거림으로 주위를 보게 되고, 몇 년 지나서는 짝을 맞아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이 태어나서 정신없는 살다보면 20∼30대를 거쳐서 장년의 나이를 맞이하게 됩니다. 젊은 날의 무쇠 같은 몸도 ‘타향살이 몇 십 년’에 여기저기 병들고...남는 것은 이렇게 힘들게 일 해 봤자 남은 게 뭔가! 하는 회의뿐입니다.

결국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10년, 20년....죽을 고생을 한 대가로 청춘만 늙어가는 자신만이 남을 뿐입니다.
(이와 비슷한 얘기로, TV 뉴스에서 농민이나 화훼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죽어라고 10년 동안 일한 대가로 불어나는 저금통장이나 부동산 대신 빚만 몇 천만 원에서 1∼2억까지 지게 됨으로써 갖는 회의와 분노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가을 만주벌판에 둥글게 떠오르는 달 아래서 이 타향살이 끝에 병든 몸뚱이만 남은 실향민한테 회의와 서러움이 가슴을 후벼 파게 됩니다. 그 ‘타향살이의 한’이 오열로 변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지나간 유행가에 불과하지만) 고복수, 황금심등 당시의 인기 가수들이 몇 년 만에 북간도에 공연을 오면 평생 모아둔 돈 다 모아 가지고 하루, 이틀을 걸어서라도 공연장까지 와서 ‘한번만 보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을 해 가며 이들의 공연을 관람합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을 떠난 십여 년에 ∼ 청춘만 늙고”
.
중략
.
.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가 옛날”

....


고복수가 '타향살이'를 열창하면 공연장 여기저기에서 흐느껴 우는 여자 분들이 생기고, 나중에는 남자들까지도 눈언저리가 벌겋게 변해갑니다.(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중 ‘going home’부분도 그 배경은 고복수의 ‘타향살이’와 비슷함, 다만 ‘going home’에 나오는 실향민들이 한국인들이 아니고 체코인들이라는 것이 다를 뿐, 초기이민자들의 겪는 실향의 아픔을 배경으로 한 것은 같음).

그들이 가슴속에 묻고 살던 '타향살이의 한'과 '타향살이의 고달픔’ 그리고 '타향살이의 절망과 허무함'이 고복수가 부르는 ‘타향살이’ 노랫말에 얹혀져서 끝내는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대중가요가 아닙니다.

하소연 하고픈 ‘타향살이의 삶’을 너무 적절하게 고복수가 대변해 주었던 것입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이러한 ‘타향살이의 한’을 모르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곳이 이사야 40‐55장입니다.

이사야 40장은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2절, 3‐5절, 6‐8절, 9‐11절을 묶어서 보겠습니다.

1‐2절은 서언으로서,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로써 40장 전체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군대의 서열 장면처럼 맨 앞의 기수가 단상으로부터 명령을 박고 '위로하라'로 외치면 다음 기수가 '위로하라'로 이어받아 나중에는 맨 마지막 줄까지 전달되는 형성을 띄고 있습니다. '위로하라'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한 체벌을 야훼의 손으로부터 두 배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배의 벌을 받았다는 것은 꼭 2배가 아닙니다.


그 운명의 무게를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됐다. 벌 받는 것은 이제는 끝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끝나게 될 부역이 이스라엘의 잘못에서 초래된 결과였음을 또 한번 듣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깨달을 때에만 이스라엘에게는 그 역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를 거쳐서 고향으로 가게 하는 길이 3-5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야훼 우리 하나님을 위한 길’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길은 바벨론 도성의 화려한 길들과 마찬가지로 원래 신들을 위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길들은 개선행진의 거대한 행렬을 통해 신들의 권세와 위엄을 보여 주는데 이바지 합니다.
이 길들을 ‘승리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야훼를 위한 길’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훼의 영광은 바벨론에서 거행되는 거대한 신상들의 행렬이 없습니다. 그 대신 그 길은 그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환 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피곤하고 지친 귀향 민들이 거대한 신상들을 대신합니다.

포로민의 귀향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야훼의 활동이요, 야훼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은 전혀 예기치 않게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었던 것입니다.(이사야 40;25, 43;14-21)

귀환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정치적 독립과, 그 땅을 잃었습니다.
더구나 그 민족과, 그 땅의 생명력의 원천인 성전과, 성전예배도 상실한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6-7절에서는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멸망하는 것처럼 우리도 멸망해가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다”는 인생무상에 대한 보편적인 탄식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8절)는 영속성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자신이 의도한 바를 실현시키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3절 이하의 외침이 ‘듣고, 길을 예비하라’는 외침이라면 6절 이하의 외침은 풀과 같은 인생과 이와 반대인 영원한 말씀을 대비시켜서 감동을 극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위로하라는 외침 가운데 9절의 "보라! 너의 하나님이시라"는 외침은 시온과 더불어 유다의 도시들도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외침입니다.

또한 9절 이하의 외침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시라는 것은 고지해야(알리고, 외쳐야)하고, 기쁨의 사신인 시온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환호하며 다른 이들(도시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전령 시온'은 야훼께서 지금 오고 있음을 선포하라는 외침을 명령 받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야훼의 도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두려워말고 외쳐 선포하라‘고 합니다. 시온은 자기 백성을 도우러 오는 분을-마치 그 도움이 이미 당도해 있는 것처럼-확신에 찬 함성으로 찬양하고 외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포로지 바벨론'에서 앞으로 곧 올 야훼의 구원에 대한 소식은 듣고, 과감히 환호함으로써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9-11절에서 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훼자신이라고 합니다. 야훼는 ‘전쟁에서 승리한 왕’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히 뒷전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 사건에서 노획하여 함께 데리고 오는 전리품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승리를 그분이 백성을 데리고 귀환하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전쟁의 용사, 승리한 왕의 모습보다 야훼의 활동을 더욱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야훼는 목자이시다"라는 비유입니다.(11절)

이 비유로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애정, 곧 패배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의 탄원자들이 이스라엘의 목자에게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서는 현실로 됩니다.(참고, 시23편)

‘이스라엘의 목자여, 들으소서!’(시편80)라는 그들의 탄식을 듣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의 길을 열어주는 목자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목자의 보호를 발견하고 모두 즐거운 귀환 행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영역에서 강한 자를 거꾸러뜨리고, 낮은 자를 높이며, 자연의 영역에서는 광야를 기름진 옥토로 바꿀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기름진 옥토를 황폐한 황무지로 바꿀 수 있는 분이지만, 오늘의 본문에서는 패배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듬뿍 가진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마치고 고국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40장의 내용은 사실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사야 40장은 시적 용어를 사용해서 야훼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점입니다. 예언자는 시적 용어를 사용하므로 써 야훼 하나님의-역사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이스라엘 포로 민들을 위한 구원활동의 극적인 효과를 높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자신을 비워 종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역사개입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빌립보서2;6-7참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분은 2천년 전에 오신 아기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의 막힌 곳을 뚫고, 낮은 곳을 메우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도 찾아서 가슴에 안고 오시는 선한 목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신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이사야7;14, 마태복음1;23)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9절은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소리를 외칠 만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와 계셨던 예수께서 이제 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주고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28;20)는 말씀을 고집스럽게 믿는 사람이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자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왕이면 이 말씀을 (마태복음28:20) 고집스럽게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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