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30, 2008

18.숨어 계신 하나님




18. "숨어 계신 하나님”(Tell me something)
18. “God the Invisible” (Tell me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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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October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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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5;15
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Isaiah 45:15
15 Truly you are a God who hides himself, O God and Savior of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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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녔던 국민 학교는-지금의 초등학교-집과 학교 사이의 거리가 시골길로 4km정도였습니다. 굽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에서 이정도의 거리라면 일반적으로 어른 걸음으로는 30-40분 정도이고, 초등학교1-2학년의 어린 학생들에게는 1시간 남짓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족한 때도 아니었고, 집집마다 냉장고에 음료수나 과일이 들어있던 시대는 더욱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서 학교 갔다 와서 먹던 간식이 궁하지 않았지만, 이른 겨울부터 늦은 봄까지는 어쩌다 다니던 떡장수에게 산 바람떡이나 찐빵이 전부이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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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이 끝나고 1시간이나 걸려서 집에 돌아오면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마당 끝에서부터 '엄마'를 부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나 혼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랐던 또래의 아이들 대부분이 학교에서 집으로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하는 행동들은 비슷했습니다. 더구나 막내로 자란 아이들에게는 그 엄마를 부르는 기간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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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갔다가 마당 끝에서 '엄마'하고 부를 때 엄마의 대답이 없거나 아예 출타 중 일 때는 왠지 허전하고, 불안하고. 시무룩하고,...대문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엄마'를 부르며 뛰어 들어와도 호들갑스럽게 맞아주던 것도 아니고 맛있는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맞아주던 것도 아닌데...이런 기분을 여러분들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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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프로에서 양노원이나 고아원, 아니면 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을 소개하는 장면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보육시설에 맡겨져서 양육되다가 양부모들에게 입양되어 지는 것을 종종 소개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헌데 양부모들에게 입양되는 12-18개월의 어린이들이(영유아) 양부모, 특히 어머니를 엄청나게 따른다고 합니다.

이 어린이들에게는 이미 어머니와 생이별한 경험이 충격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입양한 가정의 어머니가 자기 눈에 잠시만 안 보여도 불안한 증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 어린이에게는 이 잠깐조차도 엄청난 공포로 다가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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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린이에게 가장 무서운 벌은 '보이지 않는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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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나라의 어린 고아들이 외국의 가정에 많이 입양되곤 합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도 입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아예 없는 집안으로 입양되면 다른 어린이들과 비교가 안 되는데, 그 가정의 친 자식들이 있는 경우에는 종종 비교가 되곤 합니다. 친 자식들은 오히려 '마미'를 덜 부르는데 유독 한국에서 입양된 어린이만은 '마미'를 시도 때도 없이 부르며 양부모를 독차지 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동서양의 정서적인 차이점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부모한테 한 번 버림받은 아이일수록 부모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못 견뎌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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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B.C 587년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껏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 왔던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주권은 빼앗기고 왕과 고관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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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한 바로 그 고난의 시대에 한 무명의 예언자가 돌연 처참하도록 비극적인 상황에 종말을 고하고, 그 고난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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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장-55장중에서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사야 50장6절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치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결코 얼굴은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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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타난 고난은 후대의 성경 해석에 등장한 예언자의 메시야 상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포로 된 동포들 중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포로민의 생활이었습니다(시129 참고).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염은 뽑히는 일입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는 것은 더 큰 치욕입니다. 그러나 포로민 이스라엘은 이렇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 인간적인 수모를 격심하게 받아도 항거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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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만 사람이 아니고 벌레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포로민 이스라엘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치욕을 받고도 참아야 하는 체념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대다수 이스라엘의 포로 민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의 표현들은 ‘관념적인 사고’의 표현이 아니고 ‘구체적인 삶’의 표현일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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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장3절은 다시 처참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백성이지만, 지금은 오랜 포로민의 집단 거주지에서나 그들의 중노동의 일터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들을 바라볼 때는 '상한갈대'와 같은 초라한 자신들의 몰골과 더불어 그 화려하고 끈질긴 역사의 불빛조차도 이제는 꺼져가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가물거리고 있는 '꺼져가는 등불'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삶의 소망이 꺼져가는 마지막 탄식이 이 구절에 깊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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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장2절의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에서 '복역'이란 말은 원래 군대라는 말이지만 욥7장1절, 14장14절 등에서는 '중노동(고역)'으로 해석됩니다. 또는 '강제노동'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말 속에는 바벨론 각지에 흩어져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 백성들의 대부분이 강제로 노동에 참가했거나 중노동자들로서 생활했음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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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1장14절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의 표현처럼 포로 민 이스라엘은 '지렁이'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렁이'란 말은 시편 22편 6절에 그냥 '벌레'로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한 최하의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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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 그것을 짓밟아 죽여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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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난민이나 지구촌 여러 곳의 전쟁난민이나 포로들의 인권은 끝이 없을 정도로 짓밟힌 체 죽어가지만 전쟁의 가해자들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이나 지구촌 여러 곳의 전쟁난민이나 포로들의 인권은 끝이 없을 정도로 짓밟히고 있는 형편인데, 지금부터 2500년 전의 전쟁 포로들의 인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짓밟히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의 로마시대 때만 하더라도 귀족들의 정원에 기르던 칠성장어를 위해 자기 집에서 기르던 노예를 먹이로 주어도 죄가 되지 않던 시대이었음을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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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55장의 상징적 표현들은 포로 민 이스라엘의 곤고함이 극에 달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70년의 긴 바벨론 포로기로 인한 이스라엘 ‘구원사의 단절’은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보편적으로 70년은 인간세상에서 3대의 세월입니다. 늦어도 2대의 세월입니다. 이 긴 인고의 세월이 지난 뒤 이스라엘이 지은 죄 만큼의 벌을 다 받았다고, 그리고 그 벌에 대한 복역의 기간을 다 채웠다는 '기쁨의 소리가' 전언되기에 이르렀습니다.(이사야40장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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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만도 못한 포로민의 생활에서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고 외쳐도 대답 없고 보이지 않던 여호와 하나님이 드디어 '새 일'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이사야42;9,43;14-21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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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한테 주권을 빼앗겨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을 보내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포함 되어 있었지만,(이사야43장, 렘 29:1-14 참고) 그 심판의 기간을 끝내고 이스라엘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고 서방에서부터 모아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구원자임을 온 세계에 알게 하며, 이스라엘은 바로 이 일의 증인이라는 것이 여호와께서 계획한 '새 일'이라는 것입니다.(이사야43장10-12절)
그토록 도도하던 신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이사야41장25-26절, 44장28절 참고) 마침내 바벨론은 무너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유일무이한 주'시라는 선포를 제창하고 있습니다(45장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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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께서는 비 이스라엘인-페르샤인 고레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그를 통하여 열국의 왕들과 열국들을 정복케 하고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사상 전무후무 한 새로운 일을 하신다고 선포하십니다.(이사야 45장1-7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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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함이 극에 달한 포로 민들에게 이 '새로움'으로 말미암아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은 심어 줄려고 하는 것이 이사야 40-55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예언자는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섭리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전혀 새롭고 경이로운 고백을 합니다(이사야 45장15절)
마치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은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금 어머니의 젖가슴에 안기는 안도감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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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장14-17절 중에(14절) “내가 오랫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14절은 아이를 낳기 직전 산고에 신음하는 산모의 모습에 야훼하나님을 비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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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부부사이로, 부모와 자식사이로, 어머니의 역할 등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언어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신인 동형상’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사야 40장-55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의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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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장14절의 충격적인 기록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미로서의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사의 섭리를 산모가 아기를 잉태한 기간-이스라엘의 70년 바벨론 포로기-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B.C536년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내세워 이스라엘 포로 민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이스라엘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을, 아기를 낳기 직전의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충격적인 산모의 모습으로 언어화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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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역사적 전통을 통하여 비로소 '새 출애굽'을 통한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조, 생산, 회복 이라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2장14절의 아기 낳는 아픔은 절정을 이뤘지만, 이것은 새롭게 시작된 야훼의 구속행위를-구원행위-마지막 진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6절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는 결코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식지도, 끝나지도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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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더 나아가서 49장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6장3절-4절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 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자궁)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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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55장 속에는 야훼, 즉 여호와 하나님은 자궁(태)에서 이스라엘을 만드셨고, 그 후부터는 줄 곧 업고 다니거나 안고 다니시면서 양육하시다가이스라엘을 건져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어머니의 표상’을 빌려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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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긍휼의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잠깐 ‘역사 뒤에 숨어 계셨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 이사야 45장15절 '숨어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본문에서 유의해서 볼 것은 '숨어 계신 하나님=구원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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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볼 때 70년은 짧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90편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나와 있듯이, 대부분은 한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는 모든 과정이 70-80살 밖에 안 됩니다. 또 보통 1세대를 25-30년으로 계산하면 70년은 2-3대에 걸친 지루한 시간이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시편 90편10절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서 우리가 날아가나이다.(화살이 날아가듯이)” 시편 90편은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수고와 슬픔 속에서 세월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을 일깨워 주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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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으로 17살에 시작된 육체적 고통을 햇수로 25년(2008년을 기준으로 하면 31년)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 이사야45장15절 “숨어계신 하나님, 당신이 바로 구원자 이십니다.”를 산책하면서 가끔은 되뇌지만, 진실로 어렵고도 힘든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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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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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이스라엘의 찬란한 역사가 바벨론에 의해서 짓밟히고 대다수의 포로 민이 이국땅에서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면서 70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동안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서 바벨론에 끌려와 갖은 고생을 하던 포로 민 대부분은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가슴속에 묻은 체 죽어 갔습니다.(B.C 597,586에 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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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B.C536년 이후에 고국 팔레스타인에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포로민 1세대가 아니고 2-3세대 일 것입니다. 선조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야만 했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자손들에 대한 팔레스타인 회복에 대한 당부의 말씀들,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의 뉘우침,...하지만 강대국 간의 국제 정세 속에서 이스라엘 포로 민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국 해방을 위해 그들이 할 일은 없었습니다.(스가랴1:7-17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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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장-55장은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이사야 44장6절)고 단언함으로써 세계역사를 이끄는 분은 '야훼 하나님 한 분'이심을 천명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신흥 바벨론을 멸망시킨 ‘역사의 주'는 페르시아의 신 '마르둑'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이시며,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그를 기름 부어 ‘종’-메시야-으로 삼으셔서 비로소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이사야45장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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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역사 너머에 있는 야훼 하나님을 인식하고, 역사의 귀결성을 그분에게 돌리고 있다는데 이사야서의 위대성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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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계시지만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돌보신다.’ 그것이 짧은 세월동안은 잠깐의 시련이니 하고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2-3세대로 넘어가면서도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고 ‘(지금은)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지만 구원자도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오늘의 본문 이사야 45장 15절의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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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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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장-50장 요셉 이야기를 보면 그 이야기의 핵심은 창45장 5절과 이어서 7절과 8절속에 있습니다. 또 한 곳 창세기50장 20절입니다. 이스라엘선조들의 역사, 즉 인간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시라는 것이 창세기 37-50장의 핵심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모략하고 행동해도 그 인간의 행동 너머에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만, 그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고 이끄시고 이룩해 내신다’ 는 것이 '숨어계신 하나님=구원자'이시라는 신앙고백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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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이사야 45장15절, 출애굽기2장(모세 이야기)등 성경의 곳곳에서는 숨어 계시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은 성경 기자들은 후손들에게 깨우쳐 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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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55장속에는 잉태하고(이사야 44장24절), 출산하고(42장14절), 양육하며(46장4절), 조성하며(49장1절),만드시는 신(45장9-12절) 즉 모성적 속성을 강조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어머니의 애타고, 따뜻하고, 극진한 사랑보다 더 큰 ‘구원자=숨어계신 하나님’의 표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일깨워 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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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은 적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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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큰 믿음이고 장성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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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계시지만 인간의 역사를 간섭하시고, 여러분이나 내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 즉 “숨어계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라는 고백을 성경은, 또는 성령은,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여러분 머릿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 속에서 뿜어내는 하나님을 요구하십니다.

‘숨어계신 하나님=구원자’는 결코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어떠한 응답도, 어떠한 답변도 없는 무서운 적막감 속에서는 오히려 야단치고 책벌하는 것이 견디기 쉽습니다.
어떠한 음성이라도 들려주십시오!
지금의 이 침묵은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제발 한마디만이라도 응답해 주십시오!(Tell me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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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타고, 회의가 들고, 절망이 엄숙하여 저절로 어찌하여,... 내게는..., 따위의 신음이 흘러나오거나 때로는 울부짖고, 절규하고, 분노가 폭발할 때도,...성경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그러나 그 분이 또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고난 중에도 진실로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머쥐어야(꼭 붙잡아야) 할 믿음이고, 고백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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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사야 43장 11절)
“I, even I, am the LORD,
and apart from me there is no savior.” (Isaiah 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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