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25, 2008

사람의 아들





15."사람의 아들"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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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15장39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Mark 15:39
And when the centurion, who stood there in front of Jesus, heard his cry and saw how he died, he said, “Surely this man was the Son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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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에 해 뜰 때 어머님 날 낳으시고
귀엽던 아가야 내 인생 시작됐네.
12살 시절에 꿈이 있어 좋았네,
샛별의 눈동자로 별을 헤던 시절.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살 시절에 나는 사랑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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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랫말은 70년대 중반에 가수 장계현이 부른 ‘나의 20년’이라는 대중가요의 일부분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린시절의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 되곤 합니다. 천방지축 철모르고 뛰어 놀아도 세월은 흘러만 가고, 어느덧 커피와 낭만 같은 단어들이 입에 올려지는 20살 시절이 돌아옵니다. 어른들의 눈에 비치는 20살은 어설프고, 철없고, 좌충우돌하는, 아직은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반항의 세대'로 보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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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살이 바라보는 세상은 ‘모순과 가식’이 뒤엉킨 반면에, 자신은 ‘꿈과 정열’로 무장되어 있어서 모순과 가식속의 세상에 자신이 뛰어 들기만 하면 갑자가 할 일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비록 자신만의 착각이지만-온 몸이 비틀리던 그때가 20살 시절입니다.
이 20살이 40살로 바뀔 때쯤이면, 세상을 휘어잡는 사람, 세상에 우뚝 선 사람, 세상과 평온하게 보조 맞추는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세상에 짓밟히고, 세상에 억류하고, 세상에 기만당하고 ....울고, 짜증내고, 세상에 등 돌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늘어진 어깨를 추스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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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적이고 꿈 많던 20살을 한 번 더 산 40살 무렵이 되면 20대의 꿈과 정열과 낭만, 의욕만 가지고는 세상이란(인생살이) 것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눌려 사는 사람일수록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다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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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한 오백년)' 라는 노랫말처럼 세월 앞에서 각자의 삶이 가지각색으로 채색되어 개개인마다 한도 많고, 할말도 많은 세상살이도 70,80살의 황혼으로 접어들 때쯤이면 죽음 앞에서 똑같이 평등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남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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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성경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세월 앞의 인간’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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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0:9-10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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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9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저희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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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세상 모든 사람보다 귀하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극진한 보호를 받고, 낳아서는 추울세라, 더울세라, 병날세라....온갖 보살핌 가운데서 성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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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낳아서부터 버림받은 기막힌 운명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가 많이 배워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혹은 귀족이거나 노예이거나를 막론하고 ‘왕 같은 대접’속에서 처음의 인생살이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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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살이의 햇수가 더 해질수록 ‘차이’와 ‘차별’을 알게 되고, 또 그 차이에 따른 차별도 심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수도 없이 겪게 됩니다. 살면서 ‘차별’이 심해진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살이가 괴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많은 이 세상~한 오백년의 처량한 노랫말이 저절로 목구멍을 통해 올라오는 인생살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의 시작은 쉽게 시작되지만 갈수록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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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라 고백하고 믿는 주님에 대한 믿음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 역시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에 은혜 받고 믿음생활을 시작한 분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막8:34) 이르면 아연 질색하거나 “...이만큼 하면 그래도 괜찮겠지!” 하는 자기 합리화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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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교회에서 전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예수를 영접하는 ‘신앙고백의 행위’를 마치 세상에서의 '만사형통의 지름길' 이나 ‘만변통치의 특효약’을 손쉽게 구하기라도 한 듯한 착각 속에 교회에 처음 발을 들어 놓은 분들이 기복적인 약속과 성취의 내용이 풍성한 설교, 또는 몸소 우리의 괴로움을 맡으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사53:4) 위로의 설교에 이끌려 교회에 충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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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 8:34 “나를 따르라” 에 이르면 주춤거리게 됩니다. 이 본문에는 교회에서(설교) 쉽게 접할 수 있는 복도, 위로도 아닌 본인들의 구체적인 결단이 신앙생활의 과제로 요구됩니다. 회개와 감사에 이어서 각자의 결단이 요구되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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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다’는 말은 예수의 제자직분을 설명할 때 가장 합당한 말인데 신약에서 90번 가량 나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막1:17)' 로 부르셨습니다.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한 목적을 위해 모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은 버려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은 예수와 3년 동안 가까이서 살고,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 역시 예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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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가지고 제자들이 오해했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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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만 오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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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스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지만(막8:29) 예수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당할 수난을 언급했을 때, 스승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막8:32'예수를 붙잡고 항변하매(간하매)' 는 제자'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를 꾸짖다' 의뜻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꾸짖을 만큼 예수를 오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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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비슷했습니다. 예수가 수난을 받을 장소,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엄숙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영광을 받게 될 때 하나는 주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는 권력에 대한 욕심만을 드러냅니다.(막10:35‐37) 스승의 길을 전적으로 오해한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분노하는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베드로와 다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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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분이셨습니다. 이것만으로 모자라서 제자들에게 신적인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 자신의 사역과 같은 사역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 받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전파했고(막6:12) 가르쳤고(6:30), 치유했고(6:13) 귀신을 내어 쫒았습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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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제자들의 활동을 생각할 때 베드로의 막8:29 '주는 그리스도(메시야)입니다'라는 고백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예수,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부여 받은 예수, 하나님한테 인정받은 예수를 고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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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수만을 생각한 제자들 앞에 막8:31의 자신이(인자)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를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보아온 예수는 성령의 권능을 입은 분(막1:10) 능력이 넘치는 분, 귀신들이 알아보고 놀라는 분, 병든 자와 고통을 당하는 자와 연약한 무리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분, 거친 파도도 잔잔케 하시는 분, 굶주린 이들에게 기적의 빵을 주시는 분, 이런 분으로만 제자들은 생각해왔지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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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정치적 왕’ 또는 ‘신적 인간’으로 이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게 예수 자신은 ‘고난 받은 인자’로 자신의 사역을 선언 하신 것입니다.(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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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고백은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옳지만' '불충분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반이나 1/3만 맞춘 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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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도 주님을 믿는 신앙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처럼 능력이 넘치는 분, 병든 자나 고통을 당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 온갖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기는 쉬어도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진 예수의 명령, 즉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8:34) 본문 앞에서는 미리 두 손을 들거나. 어느 정도까지는 노력을 해보다가 두 손 들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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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희생이 없는 영광은 예수의 가르침에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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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오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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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를 이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길가에 앉았던 바디매오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바디 매오가 끈질기게 자비를 구하자. 예수께서 그의 눈을 보게 하심으로 바디매오의 요구로 들어 주셨습니다(막10:46-52참고).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예수님을 멈추어 세웠고, 부름을 받게 하였고, 자신의 원하는 바도 말 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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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는 베드로의 고백과는 달리 '다윗의 자손'을 외치면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께 도움을 청하면서 외쳤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스가랴서9:9의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를 연상 시킬 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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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은 주권을 남의 나라에 빼앗기고 온갖 고생과 멸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남의 나라에게 짓밟히며 고생해도 종말에는 반드시 다윗의 혈통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왕이 다시 탄생하고, 그 왕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회복한다는 것이 메시야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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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이방대적들을 멸망시켜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 다 주는 왕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왕적 권위를 행사하는 분으로 이스라엘민족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에 앞서서 예루살렘 성으로의 입성은-이것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바디매오 치유사건에 바로 뒤이어 일어납니다.(막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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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에 의해 공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워진 예수는 바로 이 칭호의 권세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입성을 하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위엄 있는 왕이 아니고 오히려 고통 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치유하고, 구원하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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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스가랴서 9장에 나오는 공의롭고, 겸손하면서도, 구원을 베풀 왕답게 그가 탈 ‘나귀새끼’를 제자들을 보내 구해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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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 이스라엘 왕들은 자신이 필요한 짐승은 징용할 수 있는 '왕적 명령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막11장 2절과 3절을 주의 있게 보시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끌고 오너라” 와 “...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명령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명령은 그 옛날부터 왕만이 내릴 수 있는 명령입니다. 다만 복음서에 기록된 '다윗의 자손, 예수'는 왕권을 행사하심에 있어서 제왕행렬의 웅대함이 아니고, 바디매오의 경우처럼 고통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왕의 표상을-자비로운 왕-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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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도 예수께 합당한 칭호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적 후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후손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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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런 기대가 성취됨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속 희망과는 -다윗의 자손은 정치적, 군사적 충돌로 인해 이방민족을 제압하고 나라를 회복한다는 메시야사상-달리 치유와 구원함의 은총을 통해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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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도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칭호처럼 '옳지만, 불충분한 고백’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 속에도 예수의 수난을 포함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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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하나님의 아들 - 십자가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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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로마 백부장의 “...그는 진실로 하나님이 아들이었도다”라는 외침어린 고백 속에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막15;39).
이 외침 속에는 하나님이 계획한 ‘구속사’의 전체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해 줍니다. ‘그는 배척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도 당할 것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심을 받고, 영광을 얻으실 것’이라는 말이 함축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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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형'은 페르시아 제국부터 시작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합니다. 그 후 그것이 그리스와 로마제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형벌은 주로 노예와 사원 약탈자, 탈영병에게 적용되었으며, 특별히 반란을 일으킨 노예에게는 잔혹한 십자가형에 가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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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괴로운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도록 만든 제도가 바로 십자가형입니다(막15:44참고).

팔레스틴에 있어서 십자가형은 정치적 폭도들에게 가해졌던 형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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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도래해서 압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 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충만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야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나 '다윗은 자손'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제를 해결해 줄 것 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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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도 이런 이스라엘 민족중의 일부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3번씩이나 모른다고 외면했고, 막14: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것은 유다와 베드로뿐만이 아니고 모든 제자들이었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예수께서 가장 극심한 위기 순간에 처했을 때 그 분을 등지고 배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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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처형당하던 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 오로지 고통당하는 예수의 끊어질 듯 들려오는 탄식과 절규만이 들릴 뿐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막15:34) 시편 기자가(시편22장1절 이하 참고) 고통 속에 외쳤던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예수의 입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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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배반과 외면을 해도 하나님의 위로와 인정이 있었다면 그 고통은 위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통 속에는 그 위로마저 없었습니다.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참고)라는 피를 토하는 절규까지도 토해내게 만든 것이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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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 곧 그의 외아들을 죽이시므로 써 온 인류를 살리시려는 계획을 그대로 이루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고통과 고난(빌2:5‐11참고)에 동참하시고 , 죄악의 짐을 대신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 절규하는 그 대가로 인간을 구원하며 그들에게 영원한 삶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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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고통의 감수와 그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뻗쳐 나왔습니다.
예수의 수 없는 고난과 땀이 피로 될 것 같은 고민을 이해하고 마침내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는 고난 받은 의인으로서 (사53장 참고) 메시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15;39, 눅 23;4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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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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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바로 그들이 그렇게 대망하던 메시야라고 고백하는데 엄청난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항상 낭독하던 구약의 맥락에서는 고난 받는 메사야가 아니고 강하고 승리를 가져 다 주는 메시야로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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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제자들이 오해했듯이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도 오해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보는 눈과 받아들이는 가슴 역시도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의 ‘고난 받은 인자’는 외면하고 ‘정치적 왕’이나 ‘신적 인간’으로만 이해한 것처럼 예수의 반쪽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온갖 능력을 갖춘 '영광의 신학'만이 머리 속에 가득 채웁니다. 막 8;31의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고, 죽어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 신학’은 발붙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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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눅 9:57-62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가 우리들에게 주어졌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찬 명령입니다. 하지만 그 명령이 주님의 명령이기에 자신과 끝없는 싸움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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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달픔입니다.
특히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고달픔에 익숙해질 때 비로소 내 안에서, 내입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막8;29, 마16:16, 눅9;20) 라는 ‘옳으면서도 충분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제자가 탄생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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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백까지 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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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로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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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신 분들이나, 본인이나, 그 밖의 무수한 기독교인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기에는 너무 벅찬 명령입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의 지위를 막론하고 이 말을 들을 귀가 있고, 담아 둘 가슴이 있는 자만이 이 말씀에 순종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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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도 강대상을 내려가는 순간, 여러분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뿐입니다. 평신도, 집사, 장로, 목사 할 것 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원하는 분은 바로 ‘자신의 선택여하에 따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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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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